조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다.

공학교육과 백남

백남 선생은 자서전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교육 사업에 투신하게 한 것도 이 나라를 근대화시킬 필요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고 피력한 바 있다.
백남 선생은 바로 조국 근대화의 핵심을 과학기술교육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했던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 사업에 몸을 던졌다.
조국이 일제 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던 1939년, 25세의 청년 김연준은 ‘과학기술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선각자의 신념으로 한양대학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교를 설립하였다. 독일의 침공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겨 실의에 빠진 덴마크 국민들에게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며 꿈을 불어넣었던 달가스와 그룬트비히의 열정에 감동한 청년 김연준은 ‘기술보국(技術保國)’의 신념으로 동아공과학교를 설립하였다.
기술이 천시되던 시절, 그의 민족애와 조국애에 바탕을 둔 동아공과학교의 설립은 조국의 산업화를 위한 인재들을 예비하는 선각자적 결단이었다. 동아공과학교는 1939년 경성시 경운정 88번지(현: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회관(현 수운회관)에서 토목과, 광산과, 건축과 등 2년제 3개 과로 개교하였다. 그러나 1944년,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술교육을 통해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던 백남 선생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꿈은 해방 후 더욱 거세게 불타올라 1945년 건국기술학교, 1947년 한양공업대학관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48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민립공과대학인 한양공과대학을 탄생시켰다.
백남 선생은 친필로 문교부에 보낸 한양공과대학의 설립 취의서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천일암담(天日暗澹) 36년, 그동안 개폐(蓋閉)되었던 조국애가 폭발되어 굉장한 세력으로 근역(槿域) 삼천리에 범람함을 본다.
나도 이 억제할 수 없는 감격에 몰려 비재박덕(非材薄德)을 돌보지 않고 이 대학운영에 감연 정신(挺身)하는 바이다. 조국애의 열정에 타고 있는 한 열혈청연이 사랑하는 재건도상의 조국에 한 건국제전(建國祭典)으로 드리는 것이 곧 한양공과대학이다” 한양공과대학은 해방된 조국에 바치는 제전(祭典)이었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 바쳐진 건국제전(建國祭典), 한양공과대학의 졸업생들은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인재들이 되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의 큰 꿈을 꾸던 청년 김연준의 공학기술교육에 대한 신념은 ‘한양이 길러낸 인재들이 없었다면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는 더 늦어졌을 것이다’는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다.
“나라가 어지럽고 가난할수록 선한 국민이 가능한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그의 애국관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한국사회의 인권 문제로 인하여 미국 내 반한 여론이 비등하여 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위한 법률이 발의되었던 시절, 백남은 스스로 몇몇 지인들과 함께 민간 외교사절단을 구성하여 미 의회 의원들과 카터 대통령을 찾아가서 한국의 안보와 발전을 위해 원조를 중단하거나 주한미군을 철수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넘기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이후에도 백남 선생은 국제 피플 투 피플 한국본부의 총재와 이북5도 행정자문위원회 위원장, 우정의 사절단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늘 앞장섰다. 백남 선생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백남 선생이 자서전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은 항일투사들의 본거지로서 자라면서 늘 들었던 항일투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부친이 젊은 시절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무관학교 군사조달임 직책을 맡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활동 경력은 그의 어린 시절 민족애를 다져나가는 등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그만큼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우리 민족과 우리 조국이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는 국가 정신은 어떤 체제의 전유물도 아니며, 정치권 내의 여당의 것도 아니며 야당의 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국가를 강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국가를 튼튼하게 할 것이냐에 대하여 냉철하고 정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백남 선생의 주장에서 보듯 그에게 있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체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백남 선생에게 있어서 공학기술교육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실천 방법이었다. “사회의 분규도 국제법상의 알력도 정치적 수단이나 군사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그의 사회인식과 사랑의 철학이 공학교육을 단순한 기술교육이 아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