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다.

인권 · 봉사와 백남

“봉사는 자기의 인격적 존엄을 염가로 파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옛사람의 말과 같이 온전하고 숭고한 생활과 만인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지를 위하여 인류애를 실천하는 바른 길인 것이다.”는 백남의 봉사관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남 김연준 선생은 소외된 이웃,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먼저 백남 선생은 인권옹호운동을 통해 사회 곳곳에 산재한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65년부터 2008년 1월 서거하시기까지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의 이사와 회장직을 맡아 무려 42년간 인권 옹호 운동에 헌신하였다.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을 통해 국제인권보를 발행하고 소외된 이들의 인권 침해 구제와 인권 신장 그리고 인권 옹호 사상 앙양을 위해 기울인 헌신적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인권개선운동본부의 총재로서 북한 인권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그 개선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임으로써 인권 옹호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백남 선생은 봉사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의 무료의료봉사를 이끌었고 국내 대학 최초로 사회봉사단을 조직하고 사회봉사를 정규과목화함으로써 학생들이 사회봉사를 통해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봉사와 기부 자선의 노력은 사실 연희전문을 다니던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었다.
연희전문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청년 김연준은 함북지방에 수재가 발생하자 수재민을 돕기 위하여 성진, 서천 등지에서 자선 독창회를 개최하고 그 수익금을 수재민들에게 기부하여 당시 언론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을 위해 잠시 접었던 음악가의 꿈을 다시 펼치면서부터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그 작곡 발표회를 자선음악회로 개최함으로써 음악까지도 봉사로 승화시켰다.
백남 선생은 봉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개별적인 온정주의는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장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동포에 대하여 그것을 경감 또는 분담할 심정과 행동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위대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그의 말에서 봉사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며 체제와도 무관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낄 수 있다.백남 선생에게 있어서 봉사란 다름 아니라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백남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다.
“획득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성공의 가능성을 획득한 것 뿐이다. 그 획득한 것이 사회와 세계에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되었느냐 하는 데서 성공 여부는 결정되는 것이라 하겠다.”는 그의 말처럼 봉사는 그의 삶의 전부였고 이를 통해 백남 선생은 영원한 사랑의 실천자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