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음악으로 승화되다.

음악과 백남

백남 김연준 선생은 한국에서 최초로 바리톤 독창회를 개최한 성악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여덟살이 되었을 때는 교회 성가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미 슈베르트의 <보리수> 등을 잘 불렀고 바이올린으로 <유머레스크> 등을 연주하여 선교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음악가가 되기 위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현제명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리하여 연희전문 재학중 서울 장곡천 공회당에서 국내 처음으로 바리톤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성악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유학을 꿈꾸었다.
그가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사실 조국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서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나는 살아오면서 평생을 조국과 민족,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내가 바리톤 가수가 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소련의 샤자핀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민족이 건재하다는 것을 선전하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자신의 꿈을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 그는 스스로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조국을 위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교육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육영사업에만 매진하였다.
그러나 “교육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다음 음악적 영감을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하신 것이다”라는 그의 자서전의 고백처럼 한양대학교의 발전의 기틀이 마련된 이후 그에게 숨어 있던 음악적 정열은 작곡을 통해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1년 9월 <김연준 가곡 100곡집>을 출판하고 이듬해 10월 28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제 1회 작곡발표회’를 개최하였다. 국내 최초로 개최된 ‘김연준 바리톤 독창회’ 이후 35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신의 음성처럼 솟구치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나게 된” 백남 선생의 창작은 매년 가곡집을 출간할 만큼 열정적으로 타올랐다. 뿐만 아니라 1979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김연준 작곡 발표회’를 개최한 이후 그의 음악은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갔다. 1979년에는 서독의 쾰른, 뒤셀도르프, 튀빙겐 등 7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음악의 밤-김연준 가곡과 전통음악’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독일 언론들은 백남 선생을 ‘슈베르트 김’이라고 칭찬을 했으며 보쿰대학의 하인즈 베커 음악연구소 소장은 백남의 가곡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낭만적이라고 부르는 음조를 사용해서 절제있게 악곡을 표현하고 있다. R. 시트라우스풍의 수직적 선율학과 라이햐르트 시대의 단순한 표현양식이 융합되어 이 작품 속에 대각선적 작풍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남 선생은 튀빙겐 대학 500주년 기념으로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주는 작곡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튀빙겐 대학의 ‘예술가상’은 피아니스트 스비야트스라브 리히텔, 바이올리니스트 렌릭 쉬링, 성악가 헤르만 프라이 등이 수상하였으며 작곡가로서는 백남이 첫째 수상자였다.
1981년 4월 3일은 백남의 음악 인생에 또다른 획을 긋는 날이었다.
드디어 뉴욕 카네기 홀에서 그의 음악이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카네기 홀의 연주회에 대하여 쥴리아드 음악원의 리차드 토리지(Richard Torigi)는 “음악회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여러 곡을 통해서 따뜻함과 탈콤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노래들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토스티의 노래를 연상하게도 했으며 또 다른 몇 곡에서는 강한 러시아적 감정도 풍겼다. 김박사의 음악은 차원 높으면서도 성악가를 위해서 부르기 쉽게 지어졌다”고 평가하였다.
백남 선생은 자신의 음악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작곡이란 억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밝힘으로써 그의 음악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음악관은 많은 성가곡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가장 어려운 시절에 처해있던 백남 선생이 가장 아름다운 국민가곡 <청산에 살리라>을 작곡한 것도 밑바탕에는 이러한 종교적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백남 선생은 1973년 소위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나중에 이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백남 선생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백남 선생이 창간했던 <대한일보>는 폐간되었고 한양대학교 이사장직도 물러나게 되었다. 옥에 갇힌 무고한 사람의 억울하고 분함 마음이 있었겠지만 백남 선생은 그 마음을 달래어 결국 <청산에 살리라>는 불후의 명곡을 탄생시켰다.
“음악은 인간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아름다운 인류, 아름다운 인간, 아름다운 생을 노래함으로써 이 국가와 민족, 모든 국민이 아름다워진다면 인류 세계도 아름다운 하모니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는 백남 선생의 말처럼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결국 사랑의 실천이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인류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그의 음악 세계를 이루었던 셈이다.